2. 하이, 미스터 메모리 1집 - 숙취 & 안경이 필요 없게 됐어

<하이, 미스터 메모리>는 숨어있던 것을 발견한 게 아니라 고맙게도 나에게 성큼 찾아와 준 앨범이다. 전국 국어교사모임에서 열었던 ‘북 콘서트’에서 처음 알게 된 음악. ‘안녕, 기억씨’라는 이름처럼 선뜻 손 내미는 듯한, 그러나 낯설지 않은 것이 그의 음악의 매력이다.

자신의 기억을 헤집고 끄집어내어 노랫말로 옮기는 것은 그의 특기다. 어릴 적 들었던 음악, 언젠가 본 영화, 누군가의 시, 이런 것들이 그의 음악의 소재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기억의 한자락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낯설지가 않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억의 색깔이 다양한 만큼 그의 음악 색깔 또한 다양하다. 동화 같은 순수함을 담은 음악부터 새롭게 재해석한 트로트, 토해내는 듯한 포크락,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판타지적인 노래까지. 삭막한 도시 한복판에 홀로 선 나무? 혹은 어린왕자의 B612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앨범처럼 우리의 오늘과 먼 미래를 담은 그의 ‘안녕(HI)’에 우리도 ‘!’로 답해보는 것은 어떨까.  


- 숙취 -

한낮에 내리는 햇살

머리는 어지럽고

어제의 내가 난 기억이 나질 않네

담배를 피워 물고

거울 앞에 서면

유령처럼 낯선 거울 속의 나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술잔 속에 비치는 어여쁜 너의 미소

빗속을 뛰었던 것 같고

울었던 것 같고

소리친 것 같은데

너에게 애원한 것 같고

울었던 것 같고

소리친 것 같은데

난 아무도 아무것도 기억이 없네


숙취. 굉장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음악 또한 투박하고 무진장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엔 쿡, 하고 웃음이 난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따라 슬퍼진다. 그러나 무겁지 않다.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차인 날, 짝사랑하던 그 또는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던 날, 술을 마시고 울어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술이 깨고 난 뒤 뒤집힌 속에 아픈 머리를 겨우 곧추 세우고 멍, 하게 서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 그래서 마음 아픈 것보다 머리 아픈 게, 속 아픈 게 더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툭 “씨발.” 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냥 쿡, 하고 웃음만 나오던 그 날이 떠오르는 노래다. 지금 숙취에 빠져 있는 당신에게 권하는 노래. 이 노래를 듣고 나면 술독으로 빠질까, 기어 나올까?


- 안경이 필요 없게 됐어 -

여기에 온 이후로

안경이 필요 없게 됐어

무엇이든 정확히 봐야 하고

무엇이든 정확히 말해야 살 수 있는 도시

시력이 유난히 나쁜 내겐

꼭 필요했던 그 안경이

이제는 시골의 어느 방 탁자 위에

장식처럼 누워 있어

안경이 없어도 넉넉하게 바라보는

푸른 산과 숲과 풀잎들

흙내음 물씬, 맘씨 고운 사람들

어느새 밝은 태양 아래 검게 그을린

내 몸에도 붉은 흙내음이

랄랄라 랄라랄라 랄라라 랄라라랄라


2007년 만들어진 일본영화 <안경>이 떠올랐던 노래다. 조용한 휴가를 보내고 싶었던 주인공이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로 여행을 오는데 곧 모든 게 심심한 이상한 곳임을 깨닫는다. 지도에도 없을 뿐 아니라 한 번씩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밖엔 없는 바다, 딱 하나밖에 없는 밥만 지어주는 민박집.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천연 팥빙수와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하는 건강 체조, 이곳을 무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지상의 천국으로 생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익숙해졌던 안경을 내려놓고 새로운 눈으로 천천히 삶을 즐길 것을 말하는 영화였다.

사실 굉장히 심심한 영화였긴 하지만, 요즘처럼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바쁜 학교일에 치이고 아이들에 지치고 별 것 아닌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상처받는 답답한 날들이면 아무도 모르는 그 바닷가에 심심하도록 누워있었으면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이 노래를 들으며 이름 모를 시골이나 조용한 절을 찾아 세상의 시계를 쫓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맞는 시간을 잠시 찾아보면 어떨까. 지금껏 쓰고 있던 안경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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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단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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