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소년
3. 재주소년 1집 - 눈 오던 날 & 귤
‘재주소년’을 알게 된 건 대학 때였다. 한참 빠져있던 ‘델리스파이스’를 보러 간 인디 라이브 공연장에서 너무나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이들을 만났다. 처음엔 ‘그룹이름이 웬 소년?’이란 생각을 했으나 기타 하나와 감성적인 노랫말, 수줍은 듯 노래하는 맑은 목소리가 공연장을 참 따뜻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재주소년’은 제주에서 온 소년'과 '재주 많은 소년'이란 두 가지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초등학교 동창인 유상봉과 박경환이 둘다 제주도로 대학을 다녔단다. 그런데다 맑고 깨끗한 제주도의 느낌을 닮은 음악을 한다. 그래서 이들을 발굴해낸 김민규가 그룹명을 재주소년으로 지어주었단다. 지금은 3집까지 정규앨범을 냈고, 여기에서 말하는 곡들은 1집에 실린 곡들이다. 다 좋지만, 역시 순수함이 가장 살아있는 1집이 개인적으론 가장 좋다.
재주소년 - 눈 오던 날
이렇게 계절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난 잊을 수가 없는 걸
그러던 어느날 다짐한거야 여전히 용기없는 나를 도와줄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조그만 테입을 내밀며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이런 내 맘을 너에게 고백하고 싶었어
정지해버린 시간 침묵을 뒤로 하고 눈이 수북히 쌓인 길 숨차도록 한없이 달리네
동화같은 노랫말. 겨울이 되면, 눈이 오면 항상 듣고 싶어지는 노래 중 하나.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10년 전 즈음엔 나도 그랬더랬다. 첫눈이 오는 날은 그냥 길 가다 안개꽃다발 한 아름 사 들고,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가고 싶었다. 점점이 찍힌 발자국으로 안개꽃처럼 그렇게. 순순히.
어릴 적 만화책에서 '첫눈이 오는 날에 안개꽃을 선물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을 고스란히 믿고 싶었는지도.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첫눈 내리는 날 다가와 그렇게 고백해 주기를 바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받지도, 안겨 주지도 못한 '첫눈 오는 날의 안개꽃'이지만 그런 맘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백이 지금 내게도 남아있길 빈다.
재주소년 - 귤
오랜만에 학교에서 후식으로 나온 귤 아니 벌써 귤이 나오다니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좀 차졌다 생각은 했지만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이야
지난 겨울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고 먹다가 손에 냄새 배긴 귤
귤 향기를 오랜만에 다시 맡았더니 작년 이맘 때 생각이 나네
찬바람에 실려 떠나갔던 내 기억 일년이 지나 또다시 생각나네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로 나는 얼마나 고민했었나
이 노래, 요즘 다시 뜨고 있어 아는 사람이 있을 거 같다. '요조'가 다시 불러 세상의 빛을 다시금 보게 된. 길가다 우연히 요조의 목소리로 듣고, 올 겨울의 문턱에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역시, 좋은 노래는 다들 알아본다.
'후식으로 나온 귤'을 먹다 작년 겨울 나를 힘들게 했던 누군가, 사랑했던 누군가, 무언가를 떠올린다는 노랫말이 참 귀엽다. 동그랗고 노란 작은 귤처럼 그렇게.
세상 일, 생각해 보면 다 그렇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일, 내가 하는 사랑, 내가 한 이별이 언젠가 귤 까먹으며 이야기하게 되는 그런 소소한 것들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