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구두 2009. 8. 15. 01:21
 
  아이러니
                      - 박영희

  저리도 많고 많은 노래 중에 왜 하필이면 가련다 떠나련다란 말인가 어쩌자고 아버지는 못살아도 좋고 외로워도 좋단 말인가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하셨다 농사꾼이 농사나 지을 일이지 나락 내는 날 아버지는 떡하니 손잡이 달린 축음기를 사들고 오셨다 동네에서 두 대뿐인 라디오도 이젠 양이 차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덕에 알게 된 코맹맹이 이난영, 가슴 쥐어짜는 나애심, 비에 젖은 고운봉…… 정말이지 아버지는 엉뚱한 양반이었다 라디오도 양에 차지 않아 축음기더니 이번엔 민비가 그립다며 흑백 텔레비였다 농사일에 고단할 텐데도 아버지는 민비에 꽃피는 팔도강산에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까지 보약 챙겨 드시듯 꼭꼭 챙겨 보셨다 입도 맞추고 허리도 껴안고 아이 러브 유도 뱀 허물 벗듯 속삭여대는 낭만적인 그 이국영화를 말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쩌자고 노래의 '노'자도 모르는 어머니를 만났을까 목포의 눈물은 고사하고 텔레비만 켰다 하면 오분 이내에 잠들어버리는 어머니를
  눈물어린 보따리에 젖어든 황혼빛 탓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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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신다. 가게에서 망치를 들고 쇠판을 내리치고 기계로 쇠를 깎으면서도 뙤약볕에 용접을 하시면서도 하루 종일 라디오는 끄지 않으신다. 윙 하고 돌아가는 기계소리, 쨍 하는 망치소리에 그 노래들이 다 들렸을까만 하루도 빼지 않고 라디오를 들으신다. 
  고등학교 땐가 하루는, 집으로 전화를 하셔서는
  "라디오 듣고 있냐?" / "아니요." 
  "라디오 좀 켜 봐라. 101.1." / "왜요?" 
  "들리냐?" / "네?"
  "지금 나오는 노래가 신효범 노랜디 요즘 젤로 좋드라." 
  "들어라, 그럼 끊는다." / 뚝..
  그러더니 저녁 때 오셔서는 악보집까지 사오라고 시키셔서 소장하고 계신다. 피아노를 치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들고 부르시는데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사실, 스무살 시절 상경해서 일을 배우면서도 기타학원을 다니신 이력도 있다.

  그리고, 아버진 다큐멘터리의 광팬이시다. 특히, 여행이나 자연에 관한. 어릴적엔 다큐를 좋아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갔지만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세계테마기행'을 즐겨 본다. 주말이면 산에 오르시거나 낚시라도 가셔서 자연을 꼭 만나고 오셔야 사시는 분이다.

  또 언어에도 관심이 많으시다. 어릴적부터 예쁜 우리말이나 잘 모르는 사투리를 가르쳐 주신 것도, 아나운서들이 진행하는 맞춤법 프로그램까지 챙겨보신 것도 우리 아버지다. 그리고 시적인 글을 보시면 감탄할 줄 아는 감성을 가지고 있으시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이 시에서처럼 엄마와 영화를 보러 가시면 아빤 눈물을 흘리시고, 엄마는 영화관에서 고이 주무신다. ㅋ

  서른해를 넘게 아버지와 엄마를 보아 오면서 어쩜 저렇게 안 맞는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을까, 어떻게 삼심년 넘게 같은 걸로 거의 매일을 다투실까. 하는데, 어쩌면 내가 모르는 두 분의 숨은 이야기가 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이 시를 읽으면서 들었다. 

  매일 투닥거리시더라도 황혼까지 아이러니하지만 늘 함께하는 모습으로 두 분이 잘 살아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