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대~통~령? 건방지게 어데 여자가 대통령을 해?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하는 거지…. 그러면 소는 누가 키워?”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인 ‘두분토론’에서 ‘남하당’ 박영진 대표가 여성 대통령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면, 이렇게 케케묵은 소리를 질러대지 않을까? 아마도, “남자 대통령들 어떻습니까? 뻣뻣하게 모가지만 세워가지고 말이죠, 무조건 힘으로 팍팍 밀어붙이고…”라는 ‘여당당’ 김영희 대표의 면박을 당할 듯싶다.

임신한 국방장관이 사열하는 스페인

박영진 대표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떠벌린다. 바야흐로 여성 대통령이 다시 세상의 화제다. 저 멀리 브라질에서는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10월6일 처음 방송된 SBS 수목드라마 <대물>에서 고현정이 여성 대통령(서혜림)으로 나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2009년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고두심이 첫 여성 대통령으로 연기했지만, 여성 대통령을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다루기는 처음이다. 브라질의 집권 노동자당(PT) 지우마 호세프(62) 후보는 10월31일 결선투표에서 당선이 유력하다. 10월3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못 미치는 46.9%를 얻어 결선투표를 치르게 됐지만, 32.6%로 2위에 그친 사회민주당(PSDB) 조제 세하(68) 후보를 크게 앞섰다. 19.42%를 얻은 3위 녹색당(PV)의 마리나 시우바(52) 후보가 열쇠를 쥐고 있으나 이변 가능성은 낮다.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는 한국에만 낯설지 외국에선 흔하다. 호세프까지 당선되면 여성 정상은 사상 최고인 17명이 된다. 현직으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대표적이다. 독일 첫 여성 총리로 2005년 11월 취임 이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줄리아 길라드 총리가 지난 6월, 코스타리카에서는 지난 2월 라우라 친치야 대통령이 첫 최고지도자에 선출됐다. 남미에서는 호세프에 앞서 2007년 12월 취임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지난 3월 물러난 미첼 바첼레트가 각각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는 동성애자임을 선언한 첫 국가 최고지도자로, 지난해 2월 취임했다.

 
오늘 우리는 스페인에서 임신한 여성 국방장관이 불룩한 배를 내밀고 의장대를 사열하고, 유럽연합 의원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의회에 참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이 장식용 ‘꽃’인 시대는 지났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여전히 ‘유리천장’이 있다지만 금이 간 지 오래고 주저앉는 것은 시간문제다. 오로지 정치만 예외다. 2010년 외무고시는 최종합격자 35명 가운데 여성이 21명으로 60%를 차지했다. 누구 말마따나, 요즈음은 축구도 여자가 더 잘한다. 17살 이하(U-17) 여자축구 월드컵에서 지난 9월 한국 선수들이 우승하지 않았는가. <대물>의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PD를 선발할 때 여성 지원자들이 실력이 좋아서 안 뽑을 수 없다”며 “방송일이 거친데도 ‘결혼도 안 하겠다. 밤새 일하겠다’고 나온다”고 말했다. 어쩌면 민주당 김성곤 의원이 10월7일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지적했듯, “남성 성기확대 수술은 과세 안 하는데 여성의 가슴확대 수술은 과세하겠다고 한다”는 ‘잔재’만 우리 사회에 일부 남아 있는지 모른다.

치마 입은 남자에서 돌봄의 리더십으로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가 늘어날 조건은 무르익었다. 뻔한 얘기지만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활동이 늘면서 여성 정치인도 많아졌다. 유럽에서는 이미 1980년대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이 남성과 비슷하거나 앞질렀고, 1990년대부터 최고지도자가 등장했다. 가정의 영역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이 사회문제를 정치로 풀어야겠다는 정치화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런 과정은 <대물>에서 그려지는 서혜림의 모습과 닮았다. 평범한 아나운서였던 서혜림은 방송사 카메라 기자인 남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돼 숨진 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정부를 비난하며 직접 정치에 뛰어든다. 서혜림은 “대한민국에서 더는 국가가 지켜주지 않는 국민들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게 내가 대통령이 된 이유입니다”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늘어나는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의 수보다 여성의 리더십이다. 21세기는 3F, 곧 여성성(Female)·감성(Feeling)·상상(Fiction)의 시대라고 한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이 세계적 베스트셀러 <메가트렌드>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나를 따르라’며 위계질서를 내세우는 남성적 리더십보다 ‘잘할 수 있다’며 격려하고 품어주는 여성적 리더십이 수평적인 21세기 네트워크 사회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김민정 서울시립대 교수(여성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 중심의 강력한 상명하달식 개발주의 리더십이 1970~80년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면, 지식기반 사회는 새로운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21세기는 남성과 다른 대안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권력형 리더십이 아닌 이른바 ‘돌봄의 리더십’의 시대라는 얘기다. 과거에는 ‘발전’과 ‘안보’가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제였다면 이제는 교육·복지·노인·환경 등 여성에게 익숙한, 여성이 강점을 가진 의제들이 주요한 시대다. 대통령학 권위자인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여성 정치인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타협하고 부정부패도 적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여성 리더십의 장점이다. 남자든 여자든 시대가 이런 리더십을 원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엄마 리더십’ ‘아줌마 리더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소수인 여성이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고, 존재 이유를 인식시키는 데 전략적으로 유효하다는 지적이 있다. ‘여자라고 모두 엄마고 아줌마냐’는 반론도 있지만 말이다.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서혜림도 한편으론 오지랖 넓은 아줌마”라고 말한다.

과거의 여성 정치인은 일부러 여성성을 감춰야 했다. ‘치마 입은 남자’, 남성다운 강인함으로 포장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1979~90년 재임)는 남자보다 더 남성스러운 리더십을 보여줬다. 1997년 대선에 출마했던 남장 정치인 김옥선(76) 전 의원은 외모로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다. 1967년에 처음 국회의원이 된 그 시대 여성의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제 ‘치마 입은 여성’은 여성·엄마·아줌마 그 자체로 승부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미사일 방어시스템 협정 체결 등을 위해 유럽 5개국을 순방하는 와중에 딸 첼시의 결혼식 준비를 챙겼다. 메르켈 총리는 후덕한 엄마 인상이지만, 4년 연속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를 차지했다.

» 주요 현직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게릴라 출신의 ‘아줌마 머리’ 정치인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유력한 호세프는 어떨까? 삶의 이력이 극과 극을 오가서 평가가 엇갈린다. 호세프는 2003년 1월 에너지장관에 임명된 뒤 ‘욕쟁이’ ‘증기기관차’로 불릴 만큼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7년 브라질 사회주의자당의 게릴라단체 ‘노동자 정치’에 가입했고, 혁명자금을 마련하려고 당시 상파울루 주지사의 집에 침입했다가 붙잡혀 복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세프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후임으로 낙점을 받은 뒤 달라졌다. 친근하게 연설하는 대중화법을 배우고, 바지 대신 여성스러운 차림을 자주 한다. 지난해는 뿔테안경을 벗고 친근한 아줌마형 머리 스타일을 선택하는 등 이미지를 뜯어고쳤다. 이제는 선출직에 한 번도 출마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부드러울지는 몰라도, 권력이라는 속성상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여전히 강조되는 탓이다.

부드러움과 카리스마, 언뜻 병립하기 힘들 것 같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떴다. 한국방송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오합지졸을 모아 훌륭한 합창단으로 변신시킨 박칼린 감독의 리더십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대물>에서도 서혜림은 국격을 높여줄 강한 대통령으로 그려진다.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서혜림 역시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남성 위주 사회의 관문을 뚫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전투적이고 강한 여성으로 바뀐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격이다”라고 말했다.

호세프는 ‘치마 입은 룰라’로 불린다. 룰라의 후광 없이 오늘날의 호세프가 가능했겠느냐는 비판이 뒤따른다. 실제 ‘이름도 모르지만 룰라가 지지한다니 찍었다’는 브라질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퇴임을 앞두고 지지율 80%를 넘나드는 룰라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지난해 2월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세하 후보에게 50.8% 대 16.6%로 뒤지던 호세프의 당선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잇따라 비리사건에 휘말려 물러나는 행운도 따랐다.

후광 없는 여성 정치인의 등장

사실 남미의 여성 지도자들은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등 1980~90년대 동남아시아 여성 지도자들처럼, 남편이나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이가 많다. 1990년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니카라과의 비올레타 차모로는 남편이 유력 야당 정치인이었고, 99년 파나마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된 미레야 모스코소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모두 남편이 전직 대통령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처럼 여성 정치인이 확충되기 위해 거치는 단계인 셈이다.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과 친치야 코스타리카 대통령 정도가 ‘자수성가형’으로 분류된다.

<대물>의 첫 방송을 본 아내가 말했다. “자꾸 박근혜가 겹치네….” 제작진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 같은 여성일 뿐, 직업이나 환경이 전혀 다르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될 뻔했고,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여성 대통령의 자리에 박 전 대표를 앉혀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첫 여성총리를 지낸 한명숙 전 총리를 포함해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금녀의 벽’을 허문 김영란 전 대법관과 강금실 변호사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문제는 그들이 후광을 입었든, 스스로 개척해왔든 간에 한 나라를 이끌고 갈 자질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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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의 독립 200주년을 맞아, 김순배 기자가 지난 8월13~26일 베네수엘라와 칠레를 현지 취재했다. 좌파 지도자들이 이끄는 남미의 변화와

도전에 관한 기사를 <한겨레> 9월20일·9월24일·10월4일치에 실었다. <한겨레21>에는 두 나라의 또 다른 면을 소개하는 생생한 탐방기를 연재한다. _편집자

»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에 대한 사랑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카라카스의 볼리바르 광장에서 시민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한겨레 김순배 기자

“애들은 시몬시토스(Simoncitos)에 보내면 돌봐주니까….”

시몬시토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친서민 정책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던 라파엘 삼브라노(32)가 말한, 취학 전 어린이를 돌보고 가르쳐주는 곳이다. 참 열렬히도 존경하는구나 싶었다. 육아시설 명칭까지 남미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이름에서 따왔다. 시몬시토스는 시몬에 어미를 덧붙여 사랑스럽게 부르는 이름으로, 한국말로 ‘귀염둥이 시몬’ ‘우리 꼬맹이 시몬’쯤 된다.

온통 볼리바르였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미국 애틀랜타를 거쳐 비행기만 17시간50분을 탄 뒤 도착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공항은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시내에 택시를 타고 다니다 보면, 도심 도로의 벽 등 곳곳에 군복을 입은 볼리바르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앞발을 치켜든 말의 고삐를 당기는 용맹스러운 볼리바르의 모습도 눈에 띈다. 카라카스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구시가지 중심은 ‘볼리바르 광장’이다. 주변에 시청사와 국회의사당 등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시민들이 나들이를 즐겼다.

이곳에서는 광장 중심의 볼리바르 동상보다 잊지 못할 ‘추억’이 새겨졌다.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한 시민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갑자기 뭔가 주르륵 흘렀다. 어깨와 카메라에까지…. 순간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끈적끈적했다. 닦아낼 휴지도 없어 짜증이 확 나는데, 광장 관리인이 낄낄대며 “이구아나가 오줌을 쌌구먼. 행운이 올 거예요”라고 말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고, 내가 보기에는 이구아나가 한꺼번에 ‘둘 다’ 싼 듯했다. 분명 ‘오줌+똥’이다. 위를 쳐다보니 울창한 나뭇가지만 보일 뿐, 망할 놈의 이구아나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냄새가 독하지 않아 다행이지 어찌나 찝찝한지…. 씻을 데도 마땅찮아 결국 생수를 사서 씻어냈다.

 


베네수엘라를 넘어선 ‘남미의 아버지’

이구아나의 오줌+똥 벼락을 맞은 뒤 코를 킁킁거리며 광장을 빠져나오니, 바로 옆에 박물관이 있는데 또 ‘볼리바르 박물관’이다. 베네수엘라 독립 200주년을 맞아 특별전시회가 열린 듯했고, 시민들이 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볼리바르의 군복과 칼을 비롯한 유품과 초상화 등이 전시됐다. 이곳에서 만난 제니퍼 곤살레스(28)는 “볼리바르는 우리에게 자유를 안긴 영웅이다. 하나로 뭉쳐 강한 남미를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친차베스 일간지 <디아리오베아>를 방문했을 때는 한쪽 벽에 4명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우고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체 게바라, 그리고 볼리바르. 그 가운데에는 ‘해방자들의 행동 계승을 돕기 위해 여기에 우리가 있다’고 쓰여 있다.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 건물을 개조해 쓰고 있는 대학교의 이름도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아나대학교’(UBV)다. 명문 국립 ‘시몬 볼리바르대’(USB)가 있지만, 서민을 위해 새로 세운 무상교육 기관이다. 2008년 바뀐 화폐의 이름도 ‘볼리바르 푸에르테’(BF)다.

차베스의 끔찍한 볼리바르 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차베스는 1999년 취임 뒤 국호에 볼리바르의 이름을 넣었다. 베네수엘라의 정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이다. 차베스는 지난 7월16일에는 볼리바르의 무덤을 파헤쳤다. 볼리바르가 결핵으로 죽은 게 아니라, 콜롬비아 귀족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앞서 7월5일에는 볼리바르의 혁명동지 겸 연인인 마누엘라 사엔스를 1830년 그가 죽은 지 180년 만에 볼리바르의 묘 옆으로 이장해 재회시켰다. 불평등·부패 등 사회적 모순에 맞서 차베스가 1982년 결성한 군부 지하 정치조직의 이름이 ‘혁명적 볼리바르 운동’(MBR200)이었던 것만 봐도, 차베스의 정신적 스승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엇갈리는 평가 속에 진행되고 있는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개혁’도 ‘볼리바르 혁명’으로 불린다.

볼리바르의 동상 등 볼리바르에 대한 존경은 차베스가 ‘제2의 볼리바르’를 꿈꾸는 베네수엘라만큼은 아니어도 남미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다. 볼리바르가 ‘남미 해방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14년에 걸쳐 독립전쟁을 지휘한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를 차례로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시켰다.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려, 북부 페루는 지명을 볼리비아, 즉 ‘볼리바르의 나라’로 바꾸었다. 볼리바르가 ‘해방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은 이유는 또 있다. 그는 링컨보다 46년이나 앞선 1816년에 노예제를 폐지해 만민평등을 실천했다.

특히 볼리바르는 멕시코·중앙아메리카·콜롬비아·페루·볼리비아·칠레를 포함하는 원대한 남미 통합의 이상을 꿈꿨다.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를 해방시킨 그는 각 지역 대표로 이뤄진 의회를 만들어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대 콜롬비아)를 창설했다. 하나의 연방을 이뤄 대국으로 성장하는 미국을 보면서, 미국에 맞서 남미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미 기수’로 불리는 차베스도 볼리바르의 남미 통합의 꿈을 잇고 있다. 차베스가 주도하는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은 쿠바·볼리비아·니카라과·에콰도르 등 5개 좌파정부 국가와 카리브해 3개 작은 섬나라가 지역 통합을 지향하는 기구다. 남미 12개 나라가 회원국인 남미국가연합(UNASUR)도 9월30일 에콰도르에서 폭동을 일으킨 경찰에 의해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감금되자, 아르헨티나에서 긴급 정상회의를 열어 코레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등 지역 국제기구의 위상을 정립하고 있다.

46살에 요절한 볼리바르는 여러 말을 남겼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무덤에 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1830년 볼리바르가 숨진 지 2년 만에 ‘그란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의 세 나라로 갈라섰다. 볼리바르가 숨지기 전부터 우려한 것처럼 혁명과 권력, 남미 통합은 무상했다. “이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3명 있다. 첫 번째는 예수,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나다.”

예수, 돈키호테, 볼리바르

볼리바르는 죽기 한 달 전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는 통치할 수 없네. 마치 혁명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바다에서 쟁기질을 하는 것처럼….” 베네수엘라 외교부에서 만난 아메노테프 삼브라노 국장은 “라틴아메리카가 단결해 미국의 주권 침해와 착취를 막고 다극화 사회를 건설하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볼리바르가 그려진 한 벽화 옆에는 ‘독립을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가난과 빈곤, 불평등에서의 ‘독립’과 ‘해방’, 특히 차베스의 남미 통합의 원대한 꿈은 이뤄질까? 그의 갈 길은 멀어 보였다.

카라카스(베네수엘라)=글·사진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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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면에서, 소설가의 급수가 나뉘는 곳 중 하나가 대화 장면이라는 말을 해놓고는 충분히 부연하지 못했다. 그 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2008)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는 대사(대화)란 곧 행동이다.”(186쪽) 변증법적 대화란 무엇일까. 대화가 명제, 반명제, 종합명제의 단계를 밟아가면서 진행되는 경우다. 저자가 제시한 기본 모형은 이렇다. “야, 너 우리 할머니처럼 운전하면 거기 못 가.”(명제) “너희 할머닌 돌아가셨잖아.”(반명제) “그러니까!”(종합명제) 대화는 단순한 탁구가 아니라는 얘기다. 굳이 말하자면, 공을 받아넘길 때마다 선수가 공중으로 10cm씩 떠오르는 탁구쯤 되려나.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더 힘있고 명쾌하게 대화에 관한 그의 작업 비밀 중 하나를 공개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멈춰버리니까요. 대화라는 것은 스테이트먼트가 아닙니다. 훌륭한 퍼커셔니스트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내지 않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문학동네> 2010년 가을호) 예컨대 “내가 하는 말 들었어?”라고 물었을 때의 좋은 대답은 “들었어”가 아니라 차라리 “난 귀머거리 아니야”다. “들었어”라는 대답은 핵심적인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이고 그 순간 대화는 멈추는 것이다. 하루키는 덧붙인다. “쓸데없이 멈춰서는 안 돼요. 그게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화는 어떤가. 확인해보니 2003년 1월26일에 나는 다음 대화를 어딘가에 옮겨 적었다. “미안해요./ 그럴 거 없어요… 이 고요가 그 보람이에요./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테지요?/ 조금… 그러나 그 보람은 거기에서만 자라지요./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이제 이렇게 우산을 받고 있으니까, 됐지./ 비가 올 거 믿었나요?/ 부르고 대답하는 것처럼.”(이윤기, <만남> 중에서) 어떤 책에 인용돼 있는 이 대화를 보고 나는 ‘소설가’ 이윤기에게 단번에 반해버렸다. 이 대화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적어도 그라면 앞의 두 저자와는 다른 ‘대화의 기술’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쯤 되면 ‘윤대녕풍 대화’가 떠오른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문학동네·2010)의 한 장면. 남자는 지금 여인의 가슴 쪽으로 손을 옮겨가는 중이다. “거기서부터는 국경이에요./ 지금 국경을 넘지 못하면 뒤쫓아온 수비대에 끌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박달나무 기둥에 묶여 총살을 당하게 될 겁니다./ 조국을 등지고 목하 어디로 망명 중인데요?/ 왜, 아실 텐데요. 오늘 밤은 당신이 내 조국이잖습니까.”(66쪽)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킥킥거린다. 결국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소’와 ‘싫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을래요’로 요약되는 성인남녀의 ‘수작’들이 어쩐지 귀엽고 애틋하고 쓸쓸하다면 그것은 윤대녕의 소설이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느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이런 대화를 나는 좋아한다. 어른들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진심이라 믿은 욕망도 세월 속에서 허망하게 스러지기 일쑤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에게 쉽게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도 말에 무게를 싣지 않고 가볍게 띄운다. 그런 말의 가벼움은, 그저 객기에 휩쓸려 마구 늘어놓는 말의 가벼움과는 다르다. 요컨대 대화란 탁구 치듯 주거니 받거니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겉옷이나 손등이 계속 스치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좋은 대화는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조짐’의 형성이다.

부기. 그러나 이윤기(1947년 5월3일~2010년 8월27일) 선생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멋진 대화를 들려줄 수 없게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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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름다운 과학 기사를 하나 읽었다. 600만 년 전부터 인류의 조상은 연민의 감정을 지녔다는 연구 결과가 <시간과 정신>(Time and Mind) 저널에 실렸다는 외신 기사였다. 그 아득한 과거에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의 조상쯤 되는 생명체들이 어떻게 동정심 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했는지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전문적 영역에 속하는 문제일 테고 어쨌든 유명한 저널에 실린 글이라니 우선 믿고 싶어진다. 아직 문명의 그림자도 주위에 드리우기 전, 그 ‘원시인’들이 연민의 정을 가슴에 담았다니!

영국 요크대학 연구진은 6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위로의 몸짓을 나누거나 타인이 지나갈 때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주는 식의 행동으로 서로 도우려는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80만 년 전에 이르면, 호모에렉투스는 아픈 동료를 돌보거나 죽은 사람을 극진히 대우함으로써 동정심과 슬픔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 50만 년 전부터 4만 년 전 사이 하이델베르크인이나 네안데르탈인 등은 다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을 오랫동안 돌봤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로 입증됐다는데, 선천적 두뇌 이상을 갖고 태어난 어린아이가 5~6살이 될 때까지 버림받지 않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유골이나 오그라든 팔에 불구의 발, 실명한 눈으로 스무 살께까지 산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그 예라고 한다. 하루하루 연명할 식량을 구하고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존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삶이 힘에 겨웠을 그 옛날 생명체들이 이렇게 고귀한 정신을 발현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이룬 모든 성취의 씨앗은 우리의 조상 인류가 뿌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석기시대 알타미라동굴에 새긴 벽화에서 싹을 보인 조상 인류의 미적 감각은 유구한 시간 속에 자라고 꽃피어 찬란한 걸작 미술품들을 낳았고, 지금은 확인할 길 없으나 분명 존재했을 원시적 음감이 진화해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교향악이 탄생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합창의 선율이 완성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600만 년 전에 씨앗이 뿌려진 이타의 감정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아마도 그건 제도라는 발명품을 통해 발전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잔인한 제도를 유지해왔지만, 어찌됐든 더 많은 이들이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제도를 조금씩이나마 가다듬어온 게 사실이다. 지금은 너무나 흔히 회자되는 탓에 그 귀중함이 오히려 희석된 듯한 민주·인권·복지 따위의 단어들이 바로 호모에렉투스에서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현생인류로 이어져온 감성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원시인류의 미적 감각이 발전해 이룬 성과에 비하면 연민의 감성이 진화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과연 아픈 동료를 보살피고 선천적 약점을 지닌 이웃을 배려하기 위해 교향악처럼 정교한 제도를 만들었는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지는 합창의 하모니처럼 조화로운 사회를 그려냈는지 돌아본다.

낯선 이들이 모여 합창단을 만들고 합창대회에 도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수많은 이들이 감동하는 한편에서 난데없이 ‘음향 대포’가 등장해 시민을 불안에 떨게 하는 대한민국에 살다 보니, 600만 년 전 우리 조상이 지녔던 미적 감각과 연민의 감성이 돌연변이로 진화하고 한데 뒤섞여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항상 자유롭고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영혼의 <넬라 판타지아>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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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담당할 노예들이 있고, 남성 간의 성교를 해결해줄 탐스러운 미소년들이 있는데, 굳이 여자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이는 고대 그리스의 한 시인이 남겨놓은 당시 그리스 남성의 집단의식을 반영하는 푸념이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우리가 아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학자들은 상당수가 동성애자였다.

미국을 바꾼 킨제이 혁명

인간에게는 다양한 성적 패턴과 각자가 구축해온 성의 스토리가 있다. 다만, 세상이 허락하는 방식만이 자주 표출되고, 나머지는 억압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낸 사람은 킨제이다. 1948년과 53년 각각 발표된 인간의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는 인류가 해온 많지 않은 성행동 연구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것이다.

동물학자였던 그는 벌의 생태를 연구하면서, 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생태의 다양성도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혼과 관련한 강의를 맡게 된 그는 인간의 성에 대한 과학적 자료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인간의 성행동 연구에 착수하고, 그리하여 1만2천 명을 인터뷰한 자료를 토대로 킨제이 보고서가 완성된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교는 죄악시되었고, 동성애는 변태나 병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여성은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이 성적 흥분을 느낄 뿐 아니라 25%의 기혼여성이 혼외정사를 경험했고, 37%의 남성, 19%의 여성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동성애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나만의 은밀한 일탈과 죄스러운 경험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겪던 사실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치밀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애와 이성애가 이분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동성애 가능성과 이성애 가능성 사이의 한 지점에 있으며 그 가능성은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상황에 따라 옮겨다닌다. 기존 성에 대한 통념은 금기를 권력으로 치환하는 통치세력에 의해 날조된 것일 뿐. 킨제이 보고서는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미국 사회가 성적 억압에서 급격히 해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는 것은 해방이며 모르면 조종당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권력은 동성애를 위험으로 간주해왔다. 그것은 성적 억압이 완화되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은 대중을 통제할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킨제이의 연구도 공산당의 음모라는 공격을 받았고, 연구지원금은 차단당했다. 인간에게 그들이 다양한 성행동 패턴을 갖는다는 사실이 ‘정상’임을 알림으로써, 권력이 성적 금기를 틀어쥐고 대중을 요리하는 것을 방해한 대가였다.

광고가 정치적·정서적 억압 반영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따위의 사고가 광고가 되어 신문에 실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 성적 지식, 성행동의 다양성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수준이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서적·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반영해주는 사건이다. 성적 억압이 필요한 사람들, 그 억압 속에서만 안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므로. 킨제이 보고서 이후 인간의 성행동을 설명해줄 더 치밀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고, 발간된 지 60년 된 킨제이 보고서는 우리나라에선 출간되지도 않았다. 이 나라의 권력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인간이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 건지….

목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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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식민지 경찰부터 부랑자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까지…

조지 오웰의 치열한 체험이 낳은 ‘정치적’ 에세이 29편 <나는 왜 쓰는가>

짐작하건대 이 책을 서가에서 집어드는 대부분의 사람은 조지 오웰이 왜 쓰는가를 궁금해한다기보다는 ‘내’가 왜 쓰는가를 더 궁금해할 것이다. 남이 글 쓰는 데 이유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라면 평소에 글을 쓰든 안 쓰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 그 이유다. 위대한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에 비춰 한 조각이라도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다면, 혹은 그 작가가 타고난 문학 천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읽는 이는 적어도 ‘조지 오웰만큼은 쓰겠다’는 환상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래서 어쩌면 마음속 깊이 간직한 욕망을 다독이는, 위로와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펴냄)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이미 너무 유명해 여러 장르로 변주되거나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줬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외에도 오웰은 많은 작품을 썼다. 오로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탓이다. 그래서 47살의 짧은 생을 살았던 작가는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외에도 서평과 칼럼을 포함한 수백 편의 에세이를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생전에 다 묶이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를 모아 4권으로 엮은 저작집 중 옮긴이가 29편을 골라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 〈나는 왜 쓰는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책의 중반이 한참 지나고야 나오는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지 않아도 독자는 그가 ‘왜’ 글을 쓰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부랑자 임시숙소에서의 며칠을 그린 ‘스파이크’,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쓴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명문 이튼스쿨 졸업생 중 유일무이하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한 경험을 살려 쓴 ‘코끼리를 쏘다’ 등은 오웰이 직접 몸으로 겪고 자신의 시선으로 옮긴 당시의 세상이다. 르포 성격을 띤 이 에세이들이 쓰인 동기는 겪은 이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절의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이는 책의 여러 장을 넘겨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만나는 한 문장과도 연결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정치’가 글을 쓰게 한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이유를 4가지로 요약해 말했는데(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이 중 네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일상에 관한 따뜻한 마음을 담은 에세이도 눈에 띈다. ‘물속의 달’은 오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펍(선술집)에 대해 쓴 글이다. ‘물속의 달’에서는 맛있는 맥주가 손님들의 식감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분홍빛 머그잔에 담겨 나온다. 인자한 여자 바텐더들은 손님 대부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무에게나 ‘오빠’ ‘언니’라 부르지 않는다. 꽤 큰 뜰이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 아빠만 밖에 나가고 엄마 혼자 집에 남아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서글픔 따위는 날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없는, 오웰의 상상 속 펍이다. 이 에세이를 쓴 동기는 그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와 연결지을 수 있겠다. “미학적 열정.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일까, 놓치기 싫은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 에세이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란 이름의 펍이 많이 생겼고, 이 글의 내용에 착안해 만든 펍 ‘웨더스푼’은 현재 700여 개 체인을 거느리고 있단다.

이 시대에 곱씹어볼 만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선별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대부분의 글은 현재의 여러 가지 정황과 연결된다. 약소국과 강대국의 불공정한 관계, 억압적인 교육, 부랑자나 빈민층의 문제가 연이어 떠오른다. 무거운 주제일 법하지만 대부분의 문장은 위트 있고 거기 담긴 감정은 솔직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글을 쓰는 이유 중 첫 번째로 꼽은 ‘순전한 이기심’을 두고 쓴 문장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굳이 쓰는 일에 목매는 이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쉬이 공감을 줄 법한 솔직함이 문장과 단어 사이에서 문득문득 솟아오른다.

한국의 현재와 연결되는 20세기 중반의 세계

음악에서 뜻 없이 쓰이는 음표 하나 없듯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29편의 에세이는 개개의 의미를 품고 하나의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편곡’해 읽어보자. 쓰인 순서대로 배열된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적잖이 띠고 있으니 오웰 생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겠고, 여러 장을 건너뛰어 ‘나는 왜 쓰는가’를 먼저 읽은 뒤 각각의 에세이들이 어떤 동기로 쓰였는지를 짐작하며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그러다 보면, 쓰고 읽는 통로가 많아진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자꾸만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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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수 조영남씨가 죽기 직전에 꼭 써보고 싶은 책이었다며 이상의 시 해설서를 출판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사례에서 보듯, 이상이라는 텍스트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늘 논쟁 중이며, 이 논쟁과 호기심의 주체는 전문 연구자를 넘어 항상 일반 독자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 이상. 뿔 미디어 제공

온갖 방법론이 동원된 ‘유일한’ 텍스트

전문 연구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전집 출판만 해도 총 5회가 이뤄진 이상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비평적 대상이 돼왔으며, 한국 문학사를 관통한 거의 모든 문학연구방법론이 적용돼온 ‘유일한’ 텍스트다. 특이한 점은 그는 문학연구자뿐만 아니라 수학자와 건축가, 미술가에게도 집요한 관심의 대상이 돼왔다는 사실이다.

1910년에 태어나 불과 스물여덟 살의 짧은 나이에 제한적인 양의 작품만을 생산하고 간 한 젊은 작가가, 지식인과 대중 독자 모두에게 이렇게 오랜 세월 계속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자체가 경이적인 일이다. 그것은 이상이라는 텍스트가 ‘박제된 천재’(<날개>)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며, 심지어는 너무 일찍 도달한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상이라는 텍스트는 작가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계의 균열상을 드러내는 ‘이상한 가역반응’이었다. 시인과 소설가가 시대의 선각자 역할을 자처하던 근대 ‘계몽기’에, 이상은 오히려 자신의 삶과 시대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는 히스테리적 질문만으로 일관함으로써, 일말의 계몽의식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문학 텍스트를 쓰게 되었다. 이상은 계급투쟁과 제국주의라는 나라 잃은 시대의 역사의식을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포섭하지 못했지만, 도시와 성(性)과 병(病)과 과학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함으로써, (식민지) 모더니티와 세계의 균열상을 증후적으로 노출하는 문제적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선각자’ 최남선이 이후 태평양전쟁을 위한 학병(學兵)을 호소하러 돌아다니고, ‘민족주의자’ 이광수가 <무정>의 말미에서 나라 잃은 시대를 진보의 낙원으로 묘사한 반면, 민족(어)에 대한 자각이 없어 일어로 시를 즐겨 썼던 이상은 병마에 시달리고 연애에 실패한 무산 지식인의 병적 무의식에 강박적으로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地球儀)”(‘AU MAGASIN DE NOUVEAUTES’), 즉 ‘가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1910년 음력 8월20일(양력 9월23일)에 태어났다. 1910년 8월22일이 한일병합조약이 선포된 날이니, 그는 조선의 망국과 더불어 태어나서 올 9월로 꼭 100살을 맞는 셈이다. 그의 출생지는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지금의 서울 사직동) 4통 6호다. 4살이 되던 1913년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하던 백부 김연필의 집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에 양자로 입양됐으며, 이곳이 그의 본적이 되었고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상은 1917년 경성부 누상동에 있는 4년제 신명학교에 입학했으며, 1921년 견지동의 동광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보성고보에 동광학교가 해체·편입되면서 보성고보 학생이 되었다. 1927년 백부의 권유로 동숭동에 있는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에 입학했고, 1929년 1등으로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상은 1929년에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으며, 그해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상은 1933년과 1935년 종로1가와 인사동에 잇따라 다방을 열기도 했다. 이때 다방을 드나들던 이들이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 1930년대 한국 문단의 이름난 댄디들이었다. 1936년 <날개> 등의 소설과 많은 시를 집필·발표하던 이상은, 그해 11월 도쿄로 간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일경에게 ‘불령선인’으로 검거돼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됐다가 건강이 악화돼 도쿄제대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4월17일에 사망하고 만다. 아내 변동림이 화장한 그의 유골을 도쿄에서 가져와 6월10일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 이상이 양자로 간 백부의 집이자 본적지인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디자인 서울’이 그의 집터에 소박한 문학관 하나를 ‘디자인’해주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겨레 자료

식민지 경성을 병적이고 불온하게 기록하다

이렇듯 이상은 생애의 마지막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시와 소설을 쓰고, 서울에서 교유하고 연애했으며, 서울의 한복판을 자신의 텍스트로 삼은 진정한 서울 토박이였다. 단편소설의 걸작 <날개>에서 가출한 주인공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경성역(서울역)의 시계탑이었으며, 주인공이 부활의 날개를 퍼덕이다가 다시 스며 들어간 “회탁의 거리”는 본정통(명동)의 미쓰꼬씨백화점(신세계백화점) 옥상과 그 앞의 거리였다. ‘운동’이라는 시에서 이상은 미쓰꼬씨백화점의 옥상정원에 올라가 경성의 휘황찬란한 거리를 사방으로 둘러보고선 “(여기엔) 아무것도없”다고 독백한다. 그가 바라본 곳은 조선은행(한국은행)과 경성부청(서울시청)과 조선우체국(광화문우체국)처럼 경성의 랜드마크가 줄지어 서 있던 선은전광장(한국은행 앞)이었고, 식민지 모더니티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완성돼가던 남대문통과 본정통 사이의 거리였다. 그는 식민지 정치권력의 핵심 공간이던 광화문 근처에서 태어나, 식민지 고등교육의 전초기지가 된 동숭동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가외가전’이라는 시에서 경성은 거대한 매춘굴로 그려졌고, ‘파첩’에서는 “상장(喪章)을 붙인” “사멸의 가나안”으로, ‘조감도’에서는 “알카포네”가 접수한 타락한 화폐도시로 묘사됐으며, ‘오감도-시제일호’에서 경성의 거리는 “무서운아해”와 “무서워하는아해”가 구별되지 않는 공포의 도로로 파악됐다. 모더니티에 대한 동경과 불신을 동시적으로 노출하는 이상의 아이러니한 작품들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구축된 식민지 경성의 은폐된 이면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한국 문학사상 가장 ‘병적’이고 불온한 기록이 되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디자인 서울’을 한다면서도 이러한 기념비적인 서울의 토박이 문화자산을 자신의 유산으로 포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서울시의 무신경과 몰역사성이다. 대신 오세훈 시장의 야심찬 ‘디자인 서울’은 광화문 앞 큰 도로에 매 계절 수억원이 드는 꽃밭을 조성해서 심었다 뽑기를 반복하고, 팬시적인 분수대를 만들고, 겨울에는 경복궁을 가리는 스노보드용 거대 구조물을 설치하고, 대형 이벤트를 치르는 일에 몰두한다. 경복궁의 권위를 훼손하는 광화문의 놀이공원화는,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둔갑시킨 식민지 일인들이나 했던 발상이다. 전임 시장의 청계천 이벤트 성공에 고무된 현 서울시장의 ‘디자인’ 마인드는 뜬금없이 남산에 물길을 파기도 하고, 서울 시내 곳곳의 도로를 파헤쳐 전시성 자전거도로를 만들고, 모든 한강다리에 조명을 비추는 일에 집중된다. 멀쩡한 한강공원 전체를 거대한 예산을 들여 파헤치기를 1년, 결국 모든 한강지구의 풍경은 동일한 모습의 ‘유원지’가 되었다. 한강의 작은 지천인 중랑천에 유람선을 띄운다는 소문도 들린다. 내가 보기엔 개별 공간이 지닌 특수성을 무화하고, 특정 공간에 스민 기억(시간성)을 도려내며, 시민의 귀한 세금을 물 쓰듯 탕진하면서 도시 공간 전체를 천박한 ‘유원지’로 변질시키는 것이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 서울’의 본질이다.

유원지가 된 서울, 문학관 하나도 그저 꿈인가

정작 그 ‘디자인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 옆 골목, 한국 문학의 살아 있는 전위인 이상의 본적지와 생가는 시인의 흔적도 살펴볼 수 없이 방치된 채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돼 있다.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타지 도쿄에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 불령선인으로 체포됐다 죽은 이상은, 100번째 생일에도 생일상을 차려줄 자기 집이 없어 여전히 서울에서도 불령선인인 셈이다. 이 천박한 ‘디자인 서울’하에서 그의 집터에 소박한 문학관 하나를 ‘디자인’해주는 일을 소망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을 소망하는 일일까.

함돈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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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참가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노래를 시작한다. (“음색은 그럭저럭 괜찮네.”) 참가자는 1절 중반쯤이 되자 서서히 표정이 변한다. (“표정이 왜 저래? 너무 오버하잖아.”) 후렴구에 들어선다. (“음정이 너무 불안한데? 그리고 이건 모창 수준이야.”) 노래가 끝나고 참가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심사를 맡은 가수 이승철과 거실 TV 앞 소파에 누워 심사에 한창인 시청자가 동시에 외친다. “오늘은 불합격 드리겠습니다.”

일주일에 딱 1시간, 슈퍼스타 지망생 11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슈퍼스타를 꿈꾸는 그 시간에 시청자는 누구보다도 엄격한 심사위원이 된다. 1층 주인집 아주머니도, 2층 아기아빠 김 대리도, 옥탑방 복학생도 케이블TV 엠넷 <슈퍼스타 K2>가 방영되는 그 시간만큼은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심사위원이다. 슈퍼스타를 만들어낼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노래다.

» 노래여, 정직하게 가슴을 울려라. 엠넷 제공

날 것 그대로의 노래, 목적이 된 노래

<슈퍼스타 K2>가 12%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신기록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합창대회 도전기’인 한국방송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 수없이 많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화제의 중심에 있는 두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노래다. <슈퍼스타 K2>에서 참가자들은 반주 없이 목소리 하나만을 들려주고, 같은 노래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래해야 살아남는다. ‘남자의 자격’ 역시 목소리만으로 조화를 이뤄야만 가능한 합창을 들려준다. 두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많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의아한 이유 역시, 노래다.

지금 우리 대중가요에서 노래는 목적이라기보다 수단에 가깝다. 노래 자체를 성취하려 하기보다 인기를 얻으려고, 또는 ‘실력파 아이돌’의 기본 조건을 갖추려고 노래한다. 5명 이상 그룹일 경우 실제 10초 이상 노래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나마 목소리는 ‘오토튠’이라고 불리는 기계음에 덧입혀져 실체를 알 수 없다. 노래는 중요하지 않다.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이 끝나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들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그들의 무대가 주는 강렬함이나 그들의 외모가 주는 신선함이다. 그들의 스타일링이나 안무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슈퍼스타 K2>와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 방송되고 나면 ‘감동적이었다’거나 ‘음색이 좋다’든가 ‘눈물을 흘렸다’ 등 조금은 난감한 평이 줄을 잇는다.

두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봐온 시청자라면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 떠오를 수밖에 없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뭘까?’ 처음 <슈퍼스타 K2>나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을 시청할 때는 자신만만했다. 노래라면 제법 들을 줄 알고, 노래방에서도 빠지지 않을 만큼 불러보지 않았나. 그런데 그 자신감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여러 번 깨진다. 내가 보기에 참 괜찮은 참가자인데 혹평을 받고, 이건 두말할 것 없이 탈락인데 칭찬이 이어진다. 심사위원의 자질을 의심하기도 하면서, 그 심사평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노래를 자꾸 보여주려고 하면 결국은 겉도는 거예요. 부르는 사람이 느낌이 없는데 듣는 사람은 어떻겠어요?”(이승철) “본인의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모든 표현이 굉장히 연로한 가수 같아요.”(아이비) “본인의 목소리를 노래에 맞춰서 많이 바꾼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아요?”(옥주현) “기존 가수들의 목소리가 교대로 들리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뭔지 모르겠어요.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박진영) “노래 속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하세요. (음을) 꺾는 거, 음정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 이거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윤종신)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아직 운전 한 번도 안 했어요. 지도만 가지고 계신 겁니다. 커브를 잘 돌고 벤딩을 잘하고 속력을 내서 차 운전을 잘하는 걸, 이제 해야 하거든요.” “외우세요. 육체적으로 외우세요. 몸에서 외우세요.” “시선이 그 보여주는 것의 반일 수가 있어요, 어떨 때는.”(이상 박칼린)

» 엠넷 제공

“노래가 가진 힘 자체를 믿고 만든 프로그램”

심사평을 들으면서 간접적으로 노래에 대해 ‘학습’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시청자는 각자 자신이 가진 노래에 대한 편견을 깨고 기준을 조금씩 수정한다. 그러면서 점차 ‘노래를 잘한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감동’이라는 추상적인 영역과 마주치게 된다.

“노래에서 약간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해야 되나, 감동적이었습니다.”(백지영) “노래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느낌이 온 것 같아요.”(엄정화) “감탄은 주는데 감동을 못 줘.”(이승철) “내가 찾는 건 이쁜 노래가 아니라 그 노래가 뭔 뜻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감정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뭔가 그게 보이든지 앞에 그걸 그리고 있든지 해야 할 텐데.” “아무런 힘이 없어, 그러면. 그냥 혼자 감상하고 있구나 이렇게 돼요. 남한테 주는 노래가 아니라 자기 혼자 집에서 거울 보고 부르는 노래라.”(이상 박칼린)

추상적이면서 애매한 감정인 ‘감동’은 신기하게도 두 프로그램을 통해 종종 실체를 드러낸다. <슈퍼스타 K2>에서 장재인과 김지수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허각과 김보경이 노래를 부르던 순간,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서 배다해가 <오페라의 유령> 삽입곡을 부르고 합창단의 목소리가 어느새 조화를 이루는 순간, 감동이라고 표현할 만한 감정이 TV를 통해 전해진다. ‘감동적이에요’라는, 얼핏 단순한 감상평은 프로그램이 노래에 대한 심사와 평가를 통해 쌓아온 결과물이고 동시에 진심을 담은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 시청자의 고백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이민희씨는 두 프로그램을 “노래가 가진 힘 자체를 믿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고 평한다. 이씨는 “진정한 노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진정한 노래가 뭔지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며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훌륭한 노래와 부족한 노래가 뭔지 구분할 수 있게 만드는데, 그건 아마도 노래를 대하는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시청자에게 평가자의 자격을 부여하고 가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에게서 노래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과 의미를 이끌어낸다”고 덧붙인다.

흉내 내는 감동은 없다

<슈퍼스타 K2>는 이런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뽑은 진짜 가수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런데 지난 시즌1을 되짚어보면 노래가 가진 힘이 이 프로그램 안에서만 끝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중음악평론가 김학선씨는 “노래의 진정성을 생각하게 하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가창에만 집중해 참가자 개개인이 가진 음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한계”라며 “결과적으로 다른 이가 만들어주는 노래만을 부르고 기획사에 끌려다니게 되는데, 지난해 우승자인 서인국이 그런 예”라고 말한다.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 ‘바로 그’ 서인국이 합창단원으로 출연했다. 서인국은 노래 하나로 <슈퍼스타 K>에서 우승했지만 데뷔 이후 가요계에서 보여준 모습은 기존 가수들을 흉내 내듯 따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합창단원으로 정직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는 새삼 그의 존재를 실감했다. 지금의 노래 역시 서인국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목소리로 감정을 전하는 고유한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노래의 노래를, 들어보자.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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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총회가 개막한 지난 9월20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인근에서 시위대들이 에이즈 치료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을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각국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오지 않으려던 의사는 말을 보내고서야 왔지만, 아내에게 약 한 모금을 먹이는 게 전부였다. 차가 없어 산모를 어깨에 메고 병원으로 가는데 피가 철철 흘렀다. 결국 (길거리에 세워진) 차 뒤쪽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고도 1시간 동안 아기와 산모가 연결된 채 고통을 참아야 했다.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9월19일치에 소개된 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사연이다.

목표라는 게 사실 모두 달성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 최고 지도자들의 약속이라면,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라면 그 책임의 무게는 달라진다. 바로 2000년, 새 천년을 앞두고 전세계 189개국 정상이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과 질병, 성차별과 아동사망 등을 대폭 개선하기로 약속한 ‘새천년개발목표’(MDGs)다. 그 뒤 10년, 지난 9월20~22일 유엔총회를 앞두고 나온 유엔 보고서는 “추가적 노력 없이는 많은 나라에서 MDG를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8대 목표(표 참조) 가운데 특히 모성사망률과 5살 미만 유아사망률 줄이기가 크게 부진하다. 그나마 빈곤율이 1990~2005년에 19%가 줄어들어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은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 결과로 해석된다.

» 1일 소득 1.25달러 미만 인구 비율. 자료: 유엔

국제원조 목표치 채우려면 5년간 350억씩 늘려야

‘목표 미달’의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원조가 단기적으로는 생명을 구했지만,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를 향상시키지는 못했다”며 “수십 년간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수백만 명을 고려해보라. 발전이 아니라 의존이며, 깨뜨려야 하는 순환구조다”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개발도상국들이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자체적으로 이루지 못하면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며 “개발원조는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유엔총회 결과 문서도 “각 나라가 경제적·사회적 발전에 주된 책임을 지며, 국가정책과 국내 자원 및 개발 전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맞는 소리다. 절반쯤만. 국제사회는 2005년 2월 ‘원조효과 제고를 위한 파리선언’에서 원조를 받는 수원국의 주인의식과 공여국·수원국 간 상호 책임성의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고위층 자녀가 군대 가는 것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은 그동안 얼마나 약속을 지켰는지 따져보자.


유엔 보고서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하부기관인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국제원조가 2009년 사상 최다인 1200억달러를 기록했지만, 올해엔 목표치인 1457억달러에서 200억달러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2005년 스코틀랜드 글리니글스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는 공적개발원조(ODA)를 500억달러, 특히 아프리카 원조를 250억달러 늘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지원만도 올해 약속한 615억달러보다 160억달러가 모자란다.

2002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개발재원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가 약속하고 공식화한 ODA 규모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0.7%다. 하지만 현재 약속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스웨덴(1.12%), 노르웨이(1.06%), 룩셈부르크(1.01%), 덴마크(0.88%), 네덜란드(0.82%) 5개국뿐이다. 영국(0.52%), 프랑스(0.46%), 독일(0.35%), 미국(0.20%), 일본(0.18%) 등은 한참 못 미친다. 한국도 0.1%(대북원조 제외)에 머물러 있다. DAC 회원국 전체 평균은 0.31%밖에 안 된다. 현 상태로는 향후 5년간 해마다 350억달러씩 늘려야 2015년에 목표치인 3천억달러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이처럼 국제원조가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이유로는 미국발 경제위기가 흔히 꼽힌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MDG 관련 고문을 맡고 있는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그는 2007~2008년 경제위기 전에 MDG에 관해 G8 정부 관리들에게 물어봤을 때, 이미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라고 되물었다”며 “애초부터 계획 이행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카리브해 섬나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랠프 곤살브스 총리는 “우리의 많은 개발 파트너(선진국)들이 명백하고 측정 가능한 약속을 진부하고 공허한 미사여구로 바꿨다”고 비판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팸의 레이 오펜하이저 대변인은 “오바마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는 동안에도 30명의 여성이 숨지고 66명의 어린이가 말라리아로 숨졌을 것이다. 대통령들의 말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런 숫자들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영국 닉 클레그 부총리도 2013년까지 국민총소득의 0.7%라는 목표치를 달성할 테니 다른 나라도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선진국의 약속 이행을 독려했다. MDG가 구속력 없는 합의다 보니, 일부에서는 국제법상으로 책임을 지우자는 목소리도 있다. 국제 간 금융거래에 세금을 물려 국제원조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등이 반대하고 있다.

» 유엔 새천년개발목표 및 세부목표. 자료: 유엔

원조는 하되 무역에서는 경쟁 원리 적용?

사실, 문제는 현금 원조만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저개발국이 자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여건 조성은 외면하고 있다. 올리비에 드 슈터 유엔 특별조사위원은 “MDG가 돈과 에너지를 동원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빈곤 현상을 공격할 뿐 저개발과 기아의 더 깊은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애초 MDG는 저개발국에 도로 등 인프라를 지원하면 경제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1980년대 논리에서 벗어나, 교육이나 보건 등 성장 여건을 구축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갖춰주자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재 저개발국 수출품의 81%(무기·원유 제외)만이 선진국 시장에서 비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이는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이 빈국 수출품의 97%를 세금이나 쿼터 없이 수출되도록 하자고 했던 목표에 크게 뒤처진다. 또 35개국에 860억달러에 이르는 부채 탕감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39개 저개발국 가운데 27개국은 채무 압박을 받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책기획팀 문상원 과장은 “선진국들이 “아프리카 원조를 늘리면서도 아프리카 농산물 수입은 규제하고 철저한 경쟁 원리를 적용하는 등 개도국 발전을 가로막는 정책을 펴고 있다”며 “정책의 일관성 없이 상호 모순적 정책을 펴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유엔총회에서도 각국 지도자들은 장밋빛 약속을 쏟아냈다. 대표적으로 각국 정부와 자선사업가의 기부로 400억달러를 조성한 뒤 여성과 아이들의 건강 증진에 투자해, 2015년까지 1600만 명의 생명을 구한다는 계획이다. 구호단체 액션에이드의 조안나 커 사무총장은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이슈에 공허한 약속을 계속하는 한 유엔 정상회의는 기대한 결과를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국제사회는 번지르르한 약속보다 최소 0.7%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필요하다.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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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의를 읽노라면, 그저 단순한 정의일 뿐인데도 뜨끔하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신체의 기능·구조상 결함’이나 ‘물리적 행동에 제약을 받는 상태’를 장애로 규정하는 건 익숙하지만, ‘사회참여에 제약을 받는 상황’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낯설다. 이건 무슨 뜻일까?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누군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오롯이 그 자신에게만 원인을 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에게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조건을 얼마나 잘 마련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WHO의 정의는 “장애란 개개인의 신체 특성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름대로 해석해보면, 장애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애인, 그러니까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든가 감각기관이 남들보다 덜 민감하다든가 한 사람들도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을 만큼 각종 인프라가 갖춰지고 타인의 편견이 사그라든다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어떤 이들은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든가 감각기관이 남들보다 덜 민감한 것을 ‘장애’로 낙인찍지 말고 그냥 ‘차이’로 부르자고 주장한다.

결국 장애-비장애를 구별짓는 ‘선’이 있다기보다는 아주 흐릿하거나 폭이 매우 넓은 모호한 ‘면’이 존재할 뿐이란 생각에 이른다.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라는 장애의 정의로 돌아가면, 사실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비장애인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휠체어를 사용해야 이동이 가능한 A는 늘 쾌활한 대화를 주도할 줄 알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갖게 한다. 코끼리만큼 튼튼한 다리를 가진 B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고 그래서 자주 타인과 다툼을 벌인다. 누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도 WHO의 정의상 장애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쉽게 친밀해지지 못하고, 자주 신경질적인 감정 표출을 하며, 힘겨운 상황을 도피하려는 성향도 보이며, 최근 들어서는 시력이 매우 떨어지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는 내 안에 매우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라는 말보다 ‘차이’라는 말에 더 공감하게 된다면, 서로 그 차이를 존중하거나 줄여나가는 노력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친구로 맞이하고,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을 위해 세금을 더 내고, 나이가 어린 사람을 측은지심으로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상,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서 장애인의 성적 권리 문제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생각의 워밍업이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이명박 대통령이 한가위 전날의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에 찾아가 어떤 말실수를 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말실수라기보다는 공감하는 능력의 결여가 아닐까 한다. 병역기피 의혹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고위 공직 후보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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