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말하다/한겨레21, 씨네21, 팝툰'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09.08.20 씨네21, 715호 중에서 - 방학 잔혹사 by 비단구두
  2. 2009.08.20 씨네21, 716호 중에서 - 기억의 상흔 by 비단구두
  3. 2009.08.20 씨네21, 713호 중에서 - 이별하지 않는 방법 by 비단구두
  4. 2009.08.20 씨네21, 715호 - 밤의 하모니 by 비단구두
  5. 2009.08.14 한겨레21 771호 - 161적, <노 땡큐!> 中에서 by 비단구두

[오마이이슈] 방학 잔혹사 | 글 : 김소희 (시민) | 2009.08.03

놀이터 기구들이 부서진 것을 종종 본다. 우리 모녀가 잠복 취재한 결과, 시소나 그네 조랑말을 부수는 이는 술 취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바로 아이들이다.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들. 이들이 놀이터에 들르는 시간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는 10~20분 남짓. 짧은 시간 거칠게 논다. 논다기보다 부순다. 마구 당기고 밀어 망가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듯이. 처음에 그런 아이들을 보면 나무라기도 했는데 애들이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을 알았다. 한창 나이에 시간에 쫓겨 농구나 줄넘기마저 주말 체육학원에서 몰아 할 정도니, 힘을 어디에 쓰겠는가. 거친 형태로 입으로 나오고 손발로 나온다. 방학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일제고사 부활 이후 중학생들까지 강제 보충수업으로 방학을 빼앗겼다. 정말 마음이 안 좋다.

대통령의 ‘입학사정관제 100% 확대’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제일 아이러니하게 다가온 단어는 ‘잠재력’과 ‘소질’이었다. 이마저 줄세우겠다는 말로 들렸다. 성적은 기본, 전공 선택에 이어 관련 경력 확보, 면접 대비 연습까지 ‘긴 시간’ 훈련시켜주는 ‘입학사정관제 맞춤형 사교육’으로 입시업계의 ‘잠재 시장’ 개척이 날개를 달 것이다. 고교등급제를 적용 못해 안달인 대학들이 이른바 ‘인재’를 어떻게 ‘사정’해낼지도 눈에 훤하다. 올해 이 전형을 하는 대학들의 요강을 보면, 기존 수능과 내신 외에 각종 공인 성적표와 증명서, 수상 경력, 추천서와 소개서, 심지어 개인 포트폴리오까지 요구한다. 이미 학원가에는 아이들의 ‘이력’과 ‘스펙’을 ‘업그레이드’하고 자기 ‘비전’을 ‘프레젠테이션’해내는 ‘스킬’을 ‘코치’할 각종 ‘컨설팅’과 ‘프로모션’들이 활개친다. 아 지랄.

백번 양보해 정말 과도한 입시경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면 100% 면접만으로 해야지. 특히 출신성분을 나타낼 수 있는 건 모조리 가려야 한다. 부모 재력이 만들어내는 성적은 한줄도 나오면 안된다. 대필할 게 뻔한 자기 소개서도 필요없다. 정녕 임기 안에 해보시든지. 뭐든 지금보다 더 나빠지겠는가. 이에 대한 인터넷 비판기사 말미에는 ‘여름방학 한달 만에 끝내는 중학생 2학기 선행학습’ 광고가 빤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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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이슈] 기억의 상흔 | 글 : 김소희 (시민) | 2009.08.10

아이와 함께 뉴스를 보다가 꺼버렸다. 평택 쌍용차 공장의 옥상에서 노조원들이 경찰에 쫓기고 맞는 장면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험한 세상 잘 헤쳐가려면 이런 것도 알아야 하겠지만, 이제 막 나쁜 놈, 착한 분, 도덕적 발달 단계에 진입한 아이에게 나쁜 놈이 아닌데도 저렇게 살인적인 테러를(그것도 경찰 아저씨에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해 심리검사를 한 일이 있다.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것을 연상하라는 주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시위 도중 쫓기고 있다”고 말했다. 길지 않은 한 시절 최루탄과 지랄탄이 쏟아지던 거리에 있었던 게 내 의식 깊이 각인돼 있나 보다. 벅찬 마음과 분노로 나서기는 했으나 내 마음 밑바닥에 그 시절의 기억은 다치거나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나중에 그 사진을 다시 볼 일이 있었는데 유럽의 10대 소년들이 깔깔 웃으며 즐겁게 뛰어다니는 장면으로 충분히 볼 만했다.


쌍용차 사태는 폭염 속에서 음식물은 물론 물도 전기도 끊긴 채 농성 공장 출입문을 스스로 용접해버린 노조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직전에야 겨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해고 비율을 조금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사실상 노조의 항복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한 노조의 결단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노사의 의견 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살인 무기들이 동원됐어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같은 종족끼리는 제아무리 영역 다툼을 한들 상대를 죽이거나 죽을 만큼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애초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의 처지를 회사가 조금만 헤아렸다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주장과 그에 따른 갈등에 정부가 일말의 책임감을 지녔더라면 우리는 이런 끔찍한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80년 광주가 그랬듯이 끔찍한 집단 기억과 상처는 쉬 사라지지도 아물지도 않는다. 이제 막 선과 악을 구별하고 양보와 책임을 배우는 내 아이가 처음 접하는 세상의 뉴스들이 이런 살풍경인 게 미안하고 두렵다. 어쩌면 이런 심정조차 사치이겠다. 쌍용차 노조원과 그 가족들, 또 그들을 진압한 특공대원들과 구사대의 기억은 과연 어떻게 치유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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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이별하지 않는 방법
글 : 김혜리 | 2009.07.31

발튀스, <캐시의 몸단장> Balthus, <La Toilette de Cathy>, 1933

화가 발튀스(1908~2001)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그랬듯 자신의 그림 속으로 슬쩍 잠입해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다. 작품 속을 미행(微行)할 때 발튀스는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포즈를 즐겨 취했다. 둥근 뒤통수와 작대기 같은 몸매를 한 화면 속 화가는 최대한 개성을 삭제한 ‘행인1’에 가까웠다. 드물게도, 발튀스의 얼굴이 정면을 드러낸 채 다른 인물들과 섞여 있는 작품이 있으니 <캐시의 몸단장>이다. 발튀스는 여기서 에밀리 브론테가 낳은 불덩이 같은 로맨스 <폭풍의 언덕> 제8장의 한 장면을 그린다. 진줏빛을 발하는 나신에 가운을 걸친 금발의 여인은 캐서린 언쇼, 다리를 꼬고 앉은 어두운 안색의 사내는 히스클리프이며 캐시의 머리를 빗겨주는 여성은 소설의 화자 역을 맡은 하녀 넬리 딘이 분명하다. 화가 본인은 의식적 선택이 아니었다고 부인한 바 있으나 <캐시의 몸단장> 속 히스클리프의 얼굴은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피부색, 옷 입은 취향까지 발튀스 본인의 사진 및 자화상과 빼도 박도 못하게 닮았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라는 캐시의 유명한 대사가 열변하듯,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피아를 분별할 수 없는 영혼의 쌍생아다. 그러나 세속적 행복 또한 선망하는 캐시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구박받는 고아 히스클리프를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경솔한 궁리를 한다. 발튀스가 그린 대목에서 캐시는 이웃의 양갓집 도련님 에드거의 방문을 기다리는 참이다. 브론테에 따르면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는 “황량한 언덕배기 탄광과 아름답고 기름진 골짜기”처럼 대조된다. 캐시와의 오붓한 한때를 기대하던 히스클리프는 외출이라도 하는지 묻고, 캐시는 고개를 젓는다. 불길함에 사로잡힌 히스클리프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실크드레스를 입는 거야?” 발튀스의 그림 속 세 인물 사이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부재하며, 히스클리프는 불안을 넘어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자의 표정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깊숙이 절망하고 있다. 그는 바로 화가 자신이다. 지금 발튀스는 소설의 한 페이지에 몰입해, 닿지 않는 세계를 향해 손을 내뻗으며 “안돼!”라고 소리없이 외친다. 그의 무력함을 비웃듯, 그림 속 캐시는 정서와 체온을 감지할 수 없는 여신의 모습이다. 그녀는 너무도 하얗고, 거대하며, 차갑다.

발튀스는 리얼리스트였지만, 현실에 접근하는 발튀스의 여정은 환상과 상상, 픽션으로 우거져 있어서 종종 완성작은 소설과 시, 비극의 무대장치처럼 보이곤 했다. 훗날 히스클리프와 동일시하지 않았냐는 비평가의 질문에 발튀스는 “나는 캐시와도 동일시했다. 위대한 서양미술의 다수는 뭔가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동일시하는 예술이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무뚝뚝한 화가가 뭐랬건 <캐시의 몸단장>은 스스로 예술가인 독자가 열애하는 텍스트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하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었다. 소설과 그림 속 세계와 현실을 가르는 벽이 훨씬 부드럽고 투명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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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밤의 하모니
글 : 김혜리 | 2009.08.14

제임스 맥닐 휘슬러,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 1872/1873
James McNeill Whistler, <Nocturne : Blue and Gold-Old Battersea Bridge> 1872/1873

밤은 내린다. 아침이나 낮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사 ‘내리다’가, 밤을 주어로 삼으면 활짝 날개를 편다. 밤은 사물과 풍경을 덮어, 크리스토의 포장 설치 예술처럼 부드럽고 대범한 덩어리만 남겨놓는다. 채 사라지지 않은 일광의 노란 흔적이 다가오는 밤의 암청색과 마주치면 초록이 감도는 깊은 파랑이 공기 중에 번진다. 강가에서 맞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한층 장중하다. 침착히 가라앉은 물의 청색이 낮게 드리운 하늘의 그것과 만나 거대한 블루의 화음을 이룬다. 우주의 움직임을 상기하게 되는 시각. 어떤 이는 신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비로소 홀로 될 수 있는 평안에 한숨을 내쉬며, 젊은이들은 하루 중 가장 근사한 일이 이제부터 일어나리라는 기대에 설렌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1834~1903)는 강과 어스름을 사랑한 화가였다. 여러 나라를 전전한 휘슬러의 삶 곁에는 미국의 코네티컷 강과 허드슨 강, 러시아의 네바 강 그리고 런던의 템스 강이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우아한 취향을 뽐내는 댄디(dandy)였던 휘슬러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호들갑스러운 빨강, 울부짖는 노랑을 탐탁지 않아했다. 대신 그는 색채의 은근한 하모니에 몰두했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따로 놀던 색채를 통합하는 황혼과 밤에 그가 반한 것도 당연하다. 화가는 이렇게 썼다. “빛이 사위어들고 그림자가 깊어지만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가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

템스 강변의 저녁을 그린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는 <야상곡> 시리즈의 대표작이다. 육중한 교각과 상판으로 이루어진 배터시 다리는 화면을 구성한 수평선과 수직선에 대범하게 조응하며 평평해진 해질녘의 시야를 보여주는 동시에 근경과 원경을 갈라 공간감을 표시하고 있다. 전경의 허리를 굽힌 뱃사람의 실루엣은 크기의 대비를 통해 강과 다리의 규모를 드러낸다. 섬세하게 변주된 청록색이 화폭 전체를 압도한 가운데, 강 건너 공장과 창고의 불빛, 어둠으로 녹아들기 직전인 사람과 배의 실루엣이 쐐기처럼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그림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붉은색을 쓴 원경의 미미한 점 하나는 상상 이상의 따뜻한 효과를 풍경 전체에 미치고 있다. 하늘에 덧없이 흩어지는 로켓의 황금빛 자취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마술적 시간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생략으로 완성된 교묘한 야상곡. 이 화폭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한 줄기 강물로 흘러가는 풍부한 펼침화음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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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은 우주를 구성하는 많은 선들을 따라가게 하는 능력이다. 그 점에서 감성은 지성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의 도움을 받아 그 선을 추적하게 한다. 감성이 멈춘 곳에서 지성은 감성을 실어나른다. 예를 들어 선물받은 초콜릿은 그저 달콤할 뿐이지만, 그 맛이 실제로 어떻게 얻어지는지는 '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와 같은 기사 덕분에 알게 된다. 초콜릿이 이제 마냥 달콤하지는 않다면, 그것은 그것에 연결돼 있는 선들을 타고 새로운 진동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맛의 이름은 이제 '달콤하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쯤 될까. 그 맛을 느낀다면 뭔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협력 안에서 감성이 지성보다 우월한 것은, 그것이 '지금 바로 여기'의 경험이 와 닿는 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만으로 그 선을 충분히 추적할 수는 없지만, 감각이 없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감성에는 취향의 정교화와 다양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좋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감성을 갖지 않는다면, 20년전에 읽은 책으로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지성의 나태함에 빠지기 쉽다. 결국 문제는 감성과 지성 사이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성과 좋은 지성을 함께 갖는 데 있다.

  감성은 지성만큼이나 개체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능력이다. 좋은 감성은 입 안에서 커피의 열두 가지 맛을 식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을 뒤지며 칡의 종류를 구분했던 친구들의 능력 속에 있다. 산속으로 나 있는 기나긴 등굣길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좋은 감성은 지성의 도움을 통해 분절된 세계의 선을 복원해 나가는 데 있다.
  오늘날 그것은 특별히 어렵다.                                                                                

                                                                     - 프랑스 리옹고등사법학교 철학박사과정 이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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