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라의 점묘화
- 나희덕
언제부턴가 선이 무서워졌어요 거침없이 달리며 형태와 색채를 뿝어내는 선에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사물에 대한 의심이 많아졌다고 할까요 아니면 빛에 대한 난해한 사랑이 생겼다고 할까요 선들이 내지르는 굉음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일요일 오후 양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자도 강둑에서 몸을 말리는 남자도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 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 그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을 빻고 또 빻는 일뿐이었어요 아침에 문밖에서 길어온 이미지를 불에 달군 쇠막대기터럼 망치로 종일 두드려요 저녁 무렵에야 뜨거워지지요 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스며들어요 검은 개는 더 이상 검은 개가 아니에요 개의 털빛과 그 위에 내리는 빛이 만나 어룽거려요 희미해진 개와 고양이와 사람 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지요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어요 서로를 삼키고 비추는 점들의 환영, 그 한 폭의 기이한 평화 앞에서 내 눈은 점점 어두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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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조용한 응시가 묻어나는 시.
서른이 넘어가면서 나도 어쩌면 선을 버리고 부드러워지고 싶고, 편안해지고 싶고, 희미해지고 싶은 건지도..
그런데, 날카로운 선을 세우고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점점 눈을 닫는 거라면?
그래도 쇠라는 빛을 얻었지만.
무뎌진다는 것, 가벼워지는 걸까 무너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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